나는 겁이 많다. 그래서 이 페이지도 몇 번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지금도 확신이 없다. 하지 않았어도 될 긁어 부스럼이 될 지도 모른다. 혹자는 '쥐뿔도 없는 녀석이 나댄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0대 중반의 나라면 나대지 말자 쪽으로 키를 틀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건 해야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다. 영원히 참을 수는 없다.
중계를 시작하면서 모든 SNS와 글쓰기를 멈추었다. 잡념과 개인적인 고집이 강했던 나라서 실수를 할까봐 SNS를 하더라도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전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조금은 인간적으로 성장한 내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조금은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첫 글의 주제는 글쎄, 나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까지 온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위한 이야기.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저 노력하며 참는 것이다.
나는 시대가 혼탁하게 섞이는 혼란한 세대에 태어났다. 수많은 직업이 없어지고 생겨났으며, 부모님이 IMF를 전면으로 겪고 극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세대다. MZ라기에는 밀레니엄 세대의 문화와 삶을 생각 이상으로 많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고, 밀레니엄 세대라기에는 잘파 세대의 상당 부분까지 겪은 요상한 나이 대다. 소위 '끼인 세대'다. 그래서 많은 사이버-온라인 문화의 태동기를 눈으로 보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최전성기 시절을 TV로 보았고, 아프리카TV의 시작 역시 함께 했다. 온게임넷이 OGN이 되는 동안 나는 유치원생에서 대학생이 되었다. 이스포츠는 젊은 세대를 매료시키기 너무 좋은 방송 콘텐츠였다.
화려하고, 자극적이면서 지루하지 않았다.
어린 내게 스포츠는 지루했다. 한 경기가 수십분을 가는 건 둘째치고 실내 활동을 좋아했던 나에게는 눈으로만 보는 콘텐츠에 불과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 스포츠는 중계를 포함해 모든 방송이 상당히 올드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당시 스포츠는 아이들과 젊은층보다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삼았으니 그게 스탠다드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에 이스포츠는 '삐까뻔쩍'한 걸 좋아할 나이의 청소년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녀석이었다.
당시 내가 꽂혔던 건 OAP(On-Air Promotion)이었는데, 대회 오프닝 영상부터 전반의 디자인 요소들을 말한다. 당시에는 관련 서적이나 정보를 얻기 조차도 힘든 시절이어서 하고 싶다고 해도 배우거나 어떻게 해야 저걸 할 수 있게 되는 지 알 겨를이 없었다. 방송을 만들고 싶으면 공부해서 신방과를 간다음, 언론고시를 보고 PD가 되는 것이 전부라고 일컬어지는 세상이었다. 학원도 별로 없었고, 방과후수업으로 퉁치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금은 흔해져버린 어도비 프로그램들(Pr, Ae, Ps, Ai 등등)의 사용법도 그때는 한글 서적이 없었고, 있더라도 한글 번역이 처참한 수준이어서 참고하기 어려웠다. 요즘 유튜브나 클래스101같은 것들이 그때는 CD와 DVD로 상당히 고가에 판매되었는데 영문 사이트를 뒤지고 뒤져서야 구매가 가능했다. 중학생이 되서야 애프터 이펙트라는 프로그램을 겨우 알게 되었는데, 그전까지 한동안 내 네이버 검색창은 '모션 그래픽 프로그램', '편집 프로그램' 등으로 도배되었었다. 결국 못찾아서 더 어렸을 때는 윈도우 무비 메이커를 썼지만 말이다.
'OAP를 하고 싶다. 내 대회와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져서 고등학교 진학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당시에는 엄청 반대를 많이 하셨다. 당시에는 아직까지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쪽의 인식이 좋지 못하던 때였다. 어머니는 '내 자식이 실패했다.'는 시선을 받기 싫으셨던 건 둘째치고 갔다가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고 한다. 뭐 당연하게도 고집 센 아들내미가 그걸 들어먹었겠냐만은.
영상보다는 영화, 어쩌다 예술
사실 나는 방송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커리큘럼이 조금 더 매력적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쪽에 더 적합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양보는 방향성까지만이었다. 적어도 훗날 대학 진학에 지장이 없을 곳이면서 내가 망가지지 않을, 학군이 나쁘지 않은 곳으로 진학하기를 원하셨다. 최종 행선지는 영상고등학교가 되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우연과 동시에 필연이지 않았을까 싶다.
반보다 동아리, 학교보다 동아리
친구들의 대부분은 영화를 하고 싶어 왔다고 했다. 내부 동아리들부터 선배들의 활동들도 대부분 영화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었고, 나도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커리큘럼은 한계가 있었다. 학교는 이론과 함께 여러 교양을 가르치고 난 후에 실기 실습으로 넘어가는 형태가 많은데, 대부분 학생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당장에 카메라 들고 뛰어 나가서 찍고 내 습작을 만들고 싶고, 더 멋진 반짝이들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필기 교과서 한 장 더 보는 거보다 카메라 들고 하루라도 더 뛰어 나가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와 내 친구들은 그랬다.
이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동아리였다. 영상고등학교는 동아리 시스템이 상당히 잘 구현되어 있었다. 대학 동아리 버금가는 경쟁과 상생이 있었고, 규율이 존재했다. 덕분에 동아리 생활 여부 차이가 상당했다.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여러 노하우를 전수받은 친구들의 성장세가 가파랐고, 대학도 관련 학과로 간 친구들이 많았던 걸 보면 영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나 역시도 주변의 영향을 받아 영화를 하게 됐다. OAP로 쏠려있던 관심사는 영화 CG로 이어졌고, 영화학을 공부하며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 운은 조금 독특하게 있었는데 보통의 학생영화는 상업 영화의 때깔을 흉내내려한다. 어째서 나는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멋진 친구들과 예술 영화만 하게 된 걸지 모르겠다. 덕분에 상은 많이 받았으니 됐다.
영화를 하면서도 이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계속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끊어질 수가 없었다고 해야한다. 영상고등학교 신관 건물 2층에는 곰TV 스튜디오가 있었다. 당시 곰TV에서는 스타크래프트2 리그인 GSL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었고, 현장 관객은 선착순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다. 최고의 환경이 아닌가? 수업이 끝나고 계단만 내려가면 경기장이라니 말이다. 정말 즐거운 2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3이 되던 해.
"엄마, 나 대학 안간다."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