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과하면 역효과를 부른다. 몸에 좋은 약도 좋다고 들이 붓다 되려 병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공부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은 건 비단 꿈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험과 수능 그리고 그걸 위한 3년의 공부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죽을 만큼 싫었다. 막상 나는 학문에 대한 열망과 욕망이 적은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결과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나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히 높았다. 노력 대비 효율이 좋았던 아들 녀석에게 부모님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10만원짜리 동네 보습 학원 하나로 비교과 과목을 제외하곤 전교권을 놓치지 않았고, 뭐든 일단 대회를 나가면 못해도 장려상 이상은 들고 돌아왔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 무리하더라도, 조금 더 투자를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그때 당시 우리 집은 한 달에 4~50만원 이상 하는 학원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당고개 반지하에서 탈출한 게 내 나이 9살이었고, 상계동 아파트로 넘어와서도 부모님 두 분이 맞벌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에 그 어머니다. 망설임은 없었다.
4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은행사거리에 있는 ‘ㅅ’ 학원을 찾아갔다. 학원을 옮길 건데, 그 전에 간단하게 테스트를 봐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어떤 시험이었는지, 얼마나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국/영/수 시험이었겠지.
당시에 여러 학원들이 그랬지만, ‘ㅅ’ 학원은 분반 시스템을 채용했다. 주기적인 시험을 통해 학생을 평가하고, 반으로 등급을 나눠 교육과 학습의 효율을 나눴다. 숫자가 높을수록 고효율반, 즉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의 반이었다. 분반은 월수금/화목토로 나뉘었는데, 월수금은 1, 3, 5반의 등원일, 화목토는 2, 4, 6반의 등원일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요일별 최고 반과 학년별 최고 반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최고 숫자가 있는 화목토의 6반이 가장 공부를 잘하는 반이었다. 테스트 결과 나는 4반이었다.
조금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내겐 좋은 자극이 됐다. “내가 최고가 아니라니.” 기분이 나빴다. 당시에 나는 1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교권에서 머문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근데 5반은커녕 4반이라니 꽤 충격이었다. 반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나 억울해요. 바꿔줘요. 이 반은 싫어요.’라고 칭얼대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표를 세웠다. 다음 테스트 때 반드시 월반하기로.
학원 성과 시험은 주기적으로 보는 실력 테스트와 월반을 위한 반 재편성 시험으로 나뉘었다. 반 재편성 시험은 2개월에서 3개월 정도로 텀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운이 좋게도 반 편성 2개월 차에 들어왔고, 다음 시험에서 성적이 나온다면 월반을 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나 하기 나름이었다. 최대한 열심히 한 달을 보냈고, 시험의 결과가 나왔다.
“월반, 6반.”
나는 대략 이쯤부터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학습하게 되었던 것 같다. 머리보다 몸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5학년의 최고 반은 8반, 6학년의 최고 반은 12반이었고, 구성원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대부분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새로운 뉴 페이스들은 월수금 분반의 최고 반에서 월반한 친구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잊을 수 없는 6학년 겨울방학, 그 기간이 찾아왔다. 학원에게 중학 과정은 이미 대학 수험 준비의 시작 단계였다. 우수한 학생들을 사전에 선별해서, 특목고에 최대한 많이 보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고, 설령 떨어진대도 이때의 선행학습은 수험에 큰 도움이 될 밑거름이 되기에 일타이피였다. 당시 외고 반 기준으로 중1이 해당 년도 까지의 고1 모의고사를 모조리 푼다. 3년이 지난다면 인간 모의고사 해설지가 되는 수준일 거다.
때문에 학원은 미리 옥석을 가리기 위해 6학년 말 겨울에 대규모 분반 시험을 진행했다. 반은 이때부터 분류가 넓어지기 시작하는데, 특목고 목적반인 외고와 과고반, 내신 상위권을 위한 내신 심화반, 중위권을 위한 내신반 그리고 하위권의 기초반, 요일 분반 모두를 합쳐 중학 과정은 총 48개의 반으로 나뉜다. 당연하게도 내 목표는 48반, 과고반이었다.
특목고 목적반은 분반 시험에서 본인이 하나를 선택해 지원하는 시스템이었다. 외고와 과고 모두 지원은 안 됐고, 하나만 골라 응시해서 성적이 나오면 그 반으로 편성되는 방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최상위라는 숫자에 집착하던 나였기에, 단순히 최고반을 가기 위해 과고반을 지원했다. 결과는 뭐 보란 듯이 탈락이었다. 문제들이 정말 어려웠다. 기억은 자세히 안 나는데, 못 풀어서 대충 찍고 나왔던 것 같다. 교실을 나오면서 X 됐다고 생각했었지 아마?
지원 후에 떨어지면 심화반으로 내려가고, 2차 시험 추가 응시 기회는 다음 반 재편성 시험 때까지 없었다. 근데, 나는 왜인지 외고반으로 편성됐다고 했다. 46반, 외고 최고반으로 말이다. 분반 시스템답게 반별로 담임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배려가 있지 않았을까... ‘이 정신 나간 놈은 왜 이 시험을 봤지? 바꿀 기회를 주마!’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반 편성이 끝나고 본격적인 입시가 시작됐다. 특목고 목적반은 주 3회가 아니라 주 4회 등원으로 일정이 바뀐다. 월수금반은 월수목금으로, 화목토반은 화목금토로 하루씩 늘어나고, 9시에 등원해 9시에 하원하는 일정이 중1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반복된다.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주 40시간을 그렇게 3개월간 태우는 셈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나는 여기서 펜을 놨다. 무엇보다 학원이 내게 알려준 건 학문의 탐구와 연구, 분석이 아니라 효율적인 풀이의 방법이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막혔을 때 머릿속을 맴도는 물음표를 지워내는 방법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당시 나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험공부는 벼락치기가 대부분이었고, 단어 시험을 위한 암기는 등원하는 학원 버스 안에서 30분 동안 어떻게든 외워 보기가 일수였다.
휘발되는 공부 방식이 대부분이라 점점 다른 아이들과의 차이는 벌어지고 또 벌어졌고, 더 버티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걸 최소 3년, 길면 6년 동안 반복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내게 수험과 수능이란 선택지는 학원을 뛰쳐나온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학교에서 배운 여러 가지 때문에 영화학교에 가도 배울 게 없을 것 같다는 그럴듯한 핑계가 생긴 건 그다음의 이야기다.
자기 생각을 꺾을 리 없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대신해 제안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단, 둘 다 하자. 보험은 있어서 나쁠 게 없으니.” 내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흔쾌히 부모님을 이겼다고 자찬하며 고3 여름, 한 인터넷 강의 프로덕션에 PD로 들어갔다. 첫 월급은 120만원, ‘ㄱ’ 대학교의 산학협력관에 터를 잡은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기숙사 동기를 포함해 동창들 몇명과 함께 입사했고, 처음엔 마감 일정이 러프해서 내 영상 작업 속도에서는 부담이 거의 없었다. 회사는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인터넷 강의 제작사였는데, 촬영부터 편집, 재생 플랫폼까지 모두 개발해서 파는 것이 목표였다. 첫 입사 2달 동안 회사는 플래시 플랫폼 개발에 주력하느라 영상 마감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에 한 편을 다 끝내지 못하고 퇴근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시간은 여유로웠다.
그렇다고 멋대로 착각했을 뿐.
회사가 납품하기로 한 마감일까지 3주가 조금 안 남았을 무렵이었다. 꾸준히 지켜지던 출퇴근 시간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게 미리미리 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모두의 작업 속도가 같지 않았고, 12개가 넘는 과목의 20주 차, 평균 45분이 넘는 영상물을 편집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간 안에 납품해야 하는 영상의 개수는 200편, 러닝타임만 10,000분 가량이 됐고, 소스를 보고 확인하는 데만 166시간, 뽑는 데에만 80시간 정도가 쓰였다. 10일 정도가 마감일에서 빠지니 실제로 남은 잔여 작업시간은 2주가 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옥의 2교대가 시작됐다.
2주 동안 우리는 9시에 나와 8시에 퇴근하는 일정을 반복했다. 당연히 이는 당시에도 불법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무얼 알고 무슨 힘이 있을까? 수험과 진학을 포기하고, 애써 들어온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그 나이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창 중 한명의 부모님이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노동부 소송과 함께 퇴사 신청을 올린 것이다. 당시 나와 함께 취업했던 친구들은 모두 같은 과 친구들이었고, 부모님들은 서로 아이들의 상황을 긴밀하게 주고받으며 지켜보고 계셨다고 들었다. 나를 제외하고.
나는 친구들과 학과도 달랐고, 부모님에게 현 상황을 말해 해결할 생각도 없었다. 내 생각과 결정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굽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결국 소송은 세 친구들만 진행했고, 나는 마저 회사를 다녔다. 물론 이야기가 쭉 이대로 이어졌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거다. 아마 중국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내가 퇴사하기 전, 회사는 내게 중국 현지에서 중국인 배우로 촬영한 웹 드라마 형태의 중국어 학습 프로그램 제작 PD 자리를 제안 했다. 한 달 정도 늦게 퇴사했다면 정말 중국에 있을 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퇴사 선언과 갑작스러운 중국 이야기, 불규칙적인 업무처리 방식에 내 불만은 쌓여만 갔다. 무엇보다 나는 속전속결로 일을 끝내고, 놀아야 되는 사람이었다. 일이 무한 반복되고 놀지 못하는 걸 내가 계속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덜 쪽팔리게, 또 다음이 있게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문자가 한 통 왔다.
‘아들, 수시 결과 나오는 날 얼마 안 남았다. 확인 꼭 해’
아버지 말마따나 나는 취업을 하면서도 담임 선생님과 함께 세 대학에 수시를 넣었다. 그 중 딱 한 곳의 대학만 1차를 합격했다. 재밌게도 하향이 떨어지고, 상향 지원한 한 곳의 1차만 합격했다. 아직도 부모님과 당시 담임 선생님, 그리고 나 사이에서는 이 부분이 넌센스로 남아 있다.
상명대는 이원화 캠퍼스라는 시스템으로 예체능 계열 중 성악 계열을 제외하곤 모조리 천안으로 보내버린 독특한 대학이었다. 수시를 보러 부모님과 함께 처음 천안으로 내려갔다. 면접 스토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잊을 수가 없다.
상명대 영화과 수시는 당시에 10배수로 1차 합격자를 뽑았다. 모집 정원이 50명이라면, 1차 합격자는 500명이 되는 거다. 면접은 연출과 연기 전공이 나뉘어 시험을 봤고, 나는 연출 전공 신청자였다. 2차 면접은 한누리관이라는 교양 대학 건물에서 진행되었는데,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접 시간은 오전 타임과 오후 타임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대기실에서 오전 절반, 오후 절반으로 나눠 매 타임 다섯명씩 들어가 면접을 봤다. 나는 제일 끝 대기 줄로 전체 면접의 가장 마지막 라인 면접자였다. 부모님은 내가 응시하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4시간 남짓을 기다렸다. 너무 안 나와 걱정했다고 한다.
면접은 먼저 다섯명이 같이 들어가 공통 질문지를 받고, 어떤 질문에 답을 할 건지 정하는 시간을 갖는 거로 시작한다. 그다음 한 명씩 차례로 교수님들이 모여있는 강의실로 들어가 고른 질문이 무엇인지 대답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뒤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의응답 형태로 진행된다. 나의 경우 3번, ‘영화의 사운드 종류를 아는 대로 말하세요.’를 선택했다. 나머지는 다 애매하기도 했고, 유일하게 답을 아는 질문이 3번이었다.
내 차례가 됐고, 조교의 안내에 따라 면접 강의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자 면접이 시작됐다.
“그래, 어떤 질문에 답을 할 건가요?”
나는 3번 질문에 답하겠다고 했다.
“좋아요. 사운드? 말해봐요.”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을 톺으며 대답했다.
“3요소로는 Voice, SE, Music이 있고, SE는 다시 폴리(Foley)와 앰비언스(Ambient)로 나뉩니다. 폴리는 효과음, 앰비언스는 배경음을 말하고요.”
중앙에 앉아있던 교수님은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띄며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음, 그래요. 그럼 그 사운드, 음향이 인상 깊었던 영화는 뭐예요?”
당황했다. 만드는 걸 좋아했지 보는 걸 좋아했던 게 아니라서 아는 영화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세계요.”
교수님들이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신..세계? 이유가 뭐죠?”
“황정민 배우가 드루와 드루와 하는 엘레베이터 씬 있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흉기에 베이고 찔리는 푸슉 푸슉 사운드가 너무 리얼해서 인상 깊었거든요.”
사실은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신세계였기에 적당히 얼버무렸을 뿐이다.
“아하. 그럼 학교에 오면 음향 전공을 하려는 건가요?”
“아니요 편집 전공이요.”
“그러면 왜 3번을 고른 거예요? 편집 관련 질문도 있었잖아요.”
“그냥 저거 밖에 모르겠더라고요.”
“답 고마워요. 면접 본다고 고생했어요. 이제 가봐도 돼요.”
기다림에 비해 면접은 상당히 짧았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느낌적으로 ‘아. 망했구나! ㅋㅋ’ 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게 푸슉푸슉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잊고 있던 수시 면접의 결과, 나는 이게 좋은 핑곗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발표 당일 오전 10시, 인적 사항을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했다.
‘예비 2번’
합격은 아니었다. 정말 운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무조건 된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말이다. 곧장 부장님에게 면담 요청을 했다.
“저 대학에 붙어서 일을 그만해야 될 것 같아요. 일은 참 좋은데, 그래도 붙은 게 아깝잖아요,”
부장님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대학에 붙었다니 회사와 부장님은 흔쾌히 축하 쫑파티까지 마련해주었다. 예비 합격자는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얼마 뒤, 정말 추가 합격 연락을 받아 근거 없는 자신감은 현실이 되었다. 부모님은 퇴사 후 대학을 가겠다는 내 결정에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다 아버지의 ‘보험’ 덕분이었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어른 말 들어 후회할 일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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