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의 마지막은 책과 함께 했다. 계기는 사소하다. 방 청소를 하다 발견한 먼지 쌓인 허세의 흔적 때문이었다. 다이어트, 금주/연과 같이 연 초 근면성실 프로젝트에 한 켠은 꼭 차지하는 '올해는 문학 소년이 될래요!' 시리즈는 항상 작심삼일로 연재가 종료 된다. 이유야 많지만 대부분 현생이 바쁘고 힘들어 정신이 없었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앞으로 내달리고 싶은데 원하는 속력이 나오지 않을 때 사람은 급해진다. 동시에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뇌는 소거법을 시작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일단 치워.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 네 주제에!
밀린 방학 숙제를 해치우듯 3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이틀 만에 먹어치웠고, 새해가 밝았다. 좋아 그럼 올해는! 이라는 마음으로 서점으로 향했다. 장르부터 작가까지 정해둔 것 없이 문고가 열리는 열시 반이 되자마자 들이닥친 무뢰한은 생각했다. '시간, 참 빠르네.' 그 목적이 문학적 갈망의 충족과 교양적 허영의 사치 중 어느 것을 위함인 지를 떠나 23년의 나는 꽤 많은 책을 샀고, 여유를 원할 때마다 서점에 갔다. 마지막으로 이 공간에 온 것이 언제였나 하는 생각이 순간 뇌를 쿡 찔렀다.
그만큼 24년의 나는 여유가 없었나? 시간은 많았는데.. 싶었다.
마지막으로 대형 서점을 갔을 때, 세상은 온통 '에세이'였다. 누군가의 성공담, 시시한 위로와 경험의 공유가 활자를 누렸다. 영화가 시대를 담는 창이라고 했던 것처럼, 서점 역시 비슷하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돈이 되는 장르를 출판사는 많이 찍어낼 거고, 그 양식의 분위기와 문체에서 풍겨오는 감정들이 현 시대를 나타낸다. '에세이'의 유행은 내게 서점의 공기를 무겁게 느껴지게 했다.
너만 삶이 힘든 게 아니야.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힘들어 그니까 힘내자. 날 봐.
힘든 걸 견뎠더니 성공했잖아? 그러니까 너도..
독서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조용한 클래식과 재즈들만 흐르는 공간 속에서, 가장 조용해야할 공간에서 서로가 아우성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문고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큼지막히 칸을 차지하고 있던 에세이 특별전은 노벨상으로 대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수상한 한 강 작가의 역대 작품들이 베스트 셀러 존을 포함해 공간의 상당 부분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설의 주도였다.
쏟아져나오는 인터넷 기사들과 커뮤니티의 예찬, 유튜브를 통한 정보 재생산을 통해 작가의 얼굴은 이미 알게 되었지만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문체를 포함해 어떤 스타일의 화풍을 추구하는 분인지도 몰랐다. 아무렴 괜찮았다. 다만, 채식주의자는 피하기로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을 읽는 것도 좋지만, 수상했다고 읽는 건 자존심 상했다. 거리를 거닐다 <OOO 방송국 O회 출연!> 같은 플래카드를 보고, 맛집인가? 먹어볼까? 하며 혹하고 들어가는 식으로 누군가의 역작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흰>과 <검은 사슴>을 집어 들고 서점을 나왔다.
<흰>은 상당히 가벼운 책 무게와 두께다. 책 자체도 가벼운 산문시와 여러가지를 읽는 느낌인데다 소재도 하얀 것들과 단어들을 토대로 쌓아가서 밝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흰>의 끝에 40페이지 가량 서술된 해설서를 통해 짐작하건데 가벼운 마음으로 볼 작품들과 문체, 주제 의식은 아닐 것이다. 나는 놓인 현재와 여러 가지로 맞물려 흥미로웠다.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책을 다 읽어갈 때 즈음은 환승역 구간이었다. 4호선에서 내려 2호선 방면 환승 게이트로 걸어가는 동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켜켜이 쌓인 거짓들로부터 도망쳐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나는 가장 먼저 허황된 꿈을 포기했다. 그간 뱉어왔던 말들과 함께 소중한 인연들과 관계를 얼룩 지우듯 새 페인트로 도배해 덮었다. 영화와 카메라는 그렇게 깨끗하게 도배된 새 방의 창고로 들어갔다. 검게 무언가에 그을렸던 자국과 곰팡이들, 어딘가에 긁혀나간 것들은 그렇게 가려졌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한 번의 이사로 공간을 새롭게 비웠더라도, 또다른 그을음도 시시이 쌓여만 갔다. 나만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완독을 한 이후, 작가가 부러웠던 이유는 저마다 확실한 '나' 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한다. 그들만의 고충 또한 존재하겠으나 적어도 자신의 글 안에서 만큼은 살고 싶은대로 살기에 가장 자기 자신 답다. 그것이 한없이 쾌활하든 우울하든 가감없이 꾸밈없이 드러내고 뽐낸다. 동시에 그들은 반문한다.
당신의 취향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거기에 맞춰 걸을 생각 없습니다. 아무렴?
당신은 이미 이 책을 샀고, 읽고 있잖아요.
어떤가요? 당신과 다른 삶은. 당신과 같은 삶은.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은?
24년의 나는 자신을 잃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행하고, 고민하며 생긴 상흔일 수도 있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계속됐던 고민을 다시 마주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잘하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을 포함해 성향까지 어느 하나 내 자신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없었다. 아는데 모르는 단어가 있는 것 역시 놀라웠다. 으레 알고 있는 추상적인 지식들 역시 많았다.
25년은 채우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 이야기는 고전(孤戰)이 되어간다.